프로와 아마추어, 경계 없는 음악교육자

광주문화재단 2022년 6월 뉴스레터 '울림'에 실은 글입니다.

2000년 밀레니엄 학번으로 진주교육대학교 과학교육과에 입학했다. 대학교 새내기 싸이월드 시절 크라잉넛, 노브레인 같은 펑크 음악에 흠뻑 빠졌다. 친구들과 노래방에 가면 늘 머리를 흔들며 ‘말달리자’ 같은 펑크 노래를 불렀다. 막연히 록 밴드가 되면 좋겠다 꿈꾸었지만, 기타나 피아노를 배운 적도 없고, 노래를 잘하지도 못했다. 끼는 있어서 어디든 앞에 나가서 마구잡이 춤을 추고 목청껏 노래는 불렀지만, 음악이라곤 기껏 노래방이 다였던 내가 밴드가 될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그러다 기회가 왔다. 술자리에서 같은 과 친구가 대학교 그룹사운드 동아리에서 자신이 보컬을 하는데 베이스기타 멤버가 그만두었다며 베이스기타 멤버를 구한다고 한다.
덥석 기회를 물었다. “베이스기타 그거 나 배운 적은 없는데 가능하나?”. 기타나 보컬에 비해 비인기 파트였던 베이스기타라 멤버 구하기 어려웠나 보다. 친구가 자신이 가르쳐 준다며 베이스기타를 해보라고 했다.
그렇게 나는 진주교대 그룹사운드 ‘싸이클론’의 3기 베이스기타 멤버가 되었다. 학원이나 다른 배움 없이 그저 보컬 친구에게 베이스기타를 배웠다. 베이스기타는 잘 치려면 무척이나 어렵지만 튀지 않게 밴드를 하는 정도는 다행히 어렵지 않았다. 즐겁게 두어 번의 정기 공연과 학교 축제 공연을 했다. 하지만 형편상 ROTC가 되어야 했기에 밴드는 그만두었다. 염색한 긴 머리를 빡빡 밀고, 군기에 잡혀 언제라도 선배들이 집합하면 얼차려를 받으러 가야 하기에 밴드를 계속할 수 없었다. 꿈같던 나의 밴드 생활은 그렇게 끝났다. 교대 졸업 후 초등교사임용시험에 합격하고, 곧바로 장교로 임관되었다.
어리바리한 소위에게 음악은 사치였다. 한해 선배들이 전역하고 중위 고참이 되니 여유가 생겼다. 낙원상가에서 13만 원짜리 통기타를 하나 사고 이정선 기타 교실 1권도 구입했다. 베이스기타는 반주가 되지 않았다.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싶었다. 그렇게 음악을 다시 시작할 수 있었다. 파주의 거의 전방에 있었던 터라 기타 학원은 가보지 못했다. 그때는 유튜브도 없었다. 대학 시절 선배들 어깨너머 기타 치던 모습들, 베이스기타를 쳤던 경험으로 연습했다. 아무리 늦게 퇴근해도 매일 3시간씩 기타를 쳤다. 그렇게 3개월을 연습하니 코드를 연주하는 것은 어떻게든 되더라.
부대에서 전역하기 전에는 장병들을 대상으로 정신교육을 할 때 통기타로 연주하며 공연하기도 했다. 내 인생 첫 기타 연주 공연이었다.
2004년 6월 30일 파주 전방의 포병부대에서 전역을 명받았다, 그리고 그다음 날인 7월 1일에 초등교사가 되었다. 운동장보다 연병장이, 운동화보다 활동화가 더 익숙한 나에겐 적응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내 초등학교 첫 보직은 담임교사가 아녔다. 교실을 돌아가며 음악 수업만 하는 음악 전담 교사였다. 내가 원한 것이 아녔다. 남는 자리가 음악 전담 교사였다. 학교의 음악책도 익숙지 않았고, 수업을 준비할 겨를이 없었다. ‘에라 모르겠다.’ 하고 군대 시절 연습했던 통기타를 들고 교실에 수업하러 들어갔다. 통기타 연습곡이었던 ‘뭉게구름’, ‘너에게 난 나에게 넌’ 같은 노래 악보를 학생들에게 나눠주고 가르쳐주고 함께 불렀다.
음악이라고는 고작 보컬에게 베이스기타를 배운 것, 독학으로 통기타로 코드 반주만 조금 할 수 있었던 나였지만 학교에서는 음악 꽤 하는 선생님이 되어있었다. 그렇게 학교 축제가 있으면 공연했고, 교직원 퇴임식 공연, 교육과정 설명회 공연, 등굣길 버스킹 공연... 학교에서 공연이 필요한 곳이면 학생들과 선생님들과 공연했다.
그러다 어느 날 우연히 머릿속에 멜로디와 가사가 떠올랐다. 학교에 마실 물이 없었다는 경험을 토대로 만든 노래였다. 기타를 들어 코드를 적당히 연주하니 그럴듯한 노래가 되었다. 그렇게 첫 작곡을 혼자 해냈다. 노래 만드는 거 어렵지 않네? 나도 할 수 있네? 하는 자신감이 차올랐다. 이후로 노래를 만들었고 기타를 치는 동생들과 ‘쌤통’이라는 팀을 만들었다. 하지만 멤버들과 집이 멀어서 어쩔 수 없이 몇 개월 만에 그만두게 되었다. 만드는 노래들은 하나둘 쌓이는데 노래를 내가 부르면 볼품이 없었다. 늘 보컬을 구하는 상황이었다. 몇 년이 지나고 우연히 옮긴 학교에서 보컬을 희망한다는 이가현 선생님을 만났다. 그렇게 수요일밴드가 시작되었다.
그때쯤 내가 가장 좋아하던 밴드는 ‘소규모 아카시아 밴드’라는 인디밴드였다. 소박하고 감성적인 음악이 좋았다. 어쿠스틱한 사운드로 앨범을 내는 밴드였는데 이 정도는 나도 할 수 있겠는데? 하는 묘한 자신감을 느끼게 되었다. 10만 원짜리 보급형 콘덴서 마이크를 구입하고 무작정 음원을 낼 만한 사운드를 녹음하려고 연구했다. ‘쿨에디터’라는 프로그램으로 교실에서 학교용 느린 컴퓨터로 어찌어찌 녹음했고, 믹싱했고, 음원을 만들어갔다. 그때 내 주변에는 음악을 하는 사람이 없었다. 서울도 아니고 경남 함안군에서는 더욱 그랬다. 막무가내로 도전하고 실패했다. 그렇게 노력 끝에 2013년 10월 13일 첫 싱글 ‘혼자’가 음원사이트에 등록되었다. 눈물이 날 만큼 기뻤다. 그렇게 데뷔를 했던 내 나이가 33살이었다.
그렇게 십 년이 흘렀다. 지금의 나는 십여 개의 미니앨범과 싱글, 컴플리케이션 앨범을 발매했다. 운 좋게 매스컴에도 알려져 티브이 방송에도 여러 번 출연하고 크고 작은 다양한 공연도 많이 했다.
늦은 나이였지만 음악을 하면서 내 인생은 큰 변화가 생겼다. 음악이 주는 감동과 행복을 알게 되었다. 함께 하는 즐거움도 알게 되었다. 성장하는 나 자신을 보며 열등감이 해소되었고, 없었던 자존감이 단단해졌다. 음악이 주는 즐거움과 내 삶의 행복을 얻을 수 있었다.
이 즐거움과 행복을 학생들도 느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학생들이 나처럼 음악 이론을 잘 몰라도 연주와 노래를 즐기고, 노래 만들 수 있다는 확신이 있었다. 음악을 쉽고 즐겁게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나의 교육 프로젝트가 ‘우쿨렐레로 노래 만들기’다. 우쿨렐레는 쉽고, 싸고, 작다. 학교 교육에 아주 좋은 적당한 악기다. 무엇보다 피아노나 통기타보다 배우기 쉽다. 반주하며 노래 할 수 있는 악기 중에는 가장 쉽다. 하루만 잘 배워도 쉬운 가요쯤은 연주하며 노래 할 수 있다.
그렇게 우쿨렐레 수업을 하는데 필요한 악보를 검색해서 복사해 학생들에게 나눠주곤 했는데 나눠주는 복사물들이 일정치 않고, 필요한 악보가 없고, 있는 악보라도 정확하지 않은 경우가 많았다. 내가 교재를 만들어야겠다 생각이 들었다. 기왕 하는 것 강의 영상도 제작하자 했다. 그래서 ‘하루 한 장 우쿨렐레’라는 유튜브 채널을 만들어 강의 영상을 제작해 공유하고, 직접 악보를 제작해 우쿨렐레 악보 나눔 사이트를 개설하고 운영하고 있다.
또 노래를 만드는 나만의 노하우도 나누고자 유튜브 채널 ‘쉬운 노래 만들기’에 강의를 제작해 올리고 학생들과 만드는 노래들을 업로드하고, 나누고 있다.
십 년 넘게 음악을 하지만 나는 프로가 아니다. 그렇다고 아마추어도 아니다. 모호한 경계에서 나는 여전히 음악을 하고 있다. 경계가 무슨 소용이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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